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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래

동연혁
1963년 01월 01일
경기도 시흥군 시흥리를 서울 영등포 시흥동으로
1970년 05월 18일
시흥동에서 시흥2동의 분동으로 시흥1동으로 명칭
1970년 10월 01일
시흥1동에서 독산동이 분동
1980년 04월 01일
영등포구에서 구로구로 분구
1980년 07월 01일
시흥1동에서 시흥4동이 분동
1983년 01월 01일
시흥1동에서 시흥본동이 분동
1989년 01월 01일
독산1동 2개통이 시흥1동으로 편입
1995년 03월 01일
구로구에서 금천구로 분구
2008년 01월 01일
시흥본동과 시흥1동의 통합
동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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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의 시흥동은 금천·구로·영등포·동작·관악구와 광명,안양시를 관할하던 관아(官衙)가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 관아의 위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읍지, 지리지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면 지금의 시흥5동 시내버스(범일운수) 종점 부근인 것 같다. 이곳의 관아는 1910년 12월 7일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시흥군 청사가 이전할 때까지 1천여년간 있었다고 추측된다.

  •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志)에 의하면 6대 성종(991년)이 고을의 별호를『始興』으로 했다 한다. 이때부터 비로서 시흥이란 명칭이 공식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시흥이란 글자 그대로『일어나다, 뻗어나다, 으뜸이 되다』라는 뜻이다. 고구려때의 지명인 잉벌노(仍伐奴)의 잉벌(仍伐)은『늠』으로, 느르→늘→늣→늠의 음전(音轉)으로 연장(延長)을 뜻한다. 노(奴)는 내(==)의 음차(音借)로 흙 또는 평지를 뜻한다. 그래서 시흥과 잉벌로(仍伐奴)는 서로 통함을 알 수 있다.

  • 이렇게 이 고을은 공식 행정명칭이기 이전부터 시흥이라 불리게 되었고 금주현에 이어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금천(衿川)으로 개명된 후에도 별명으로 시흥이라 불렸다.

  • 조선 정조 19년(1795년)에 시흥현으로 개명되면서 종 6품 현감이 종 5품 현령(縣令)으로 승격되었다. 정조(正祖)임금은 수원에서 있는 현륭원에 전배하기 위해 1790년부터 1800년까지 11년동안 12차례 능행을 했다. 정조임금은 동화문을 통하여 남대문, 한강대교, 장승백이, 신대방3거리, 신대방1동(시흥대로)을 경유하여 금천구 관내에 들어섰다. 구로공단 전철역앞 도림천과 시흥대로 교차점에 마장천다리(당시는 도림천을 마장천이라 했음)가 있었는데 정조임금은 이곳을 지나 문성골(현재의 문성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의 옛 고을명)을 거쳐 수천 참발소앞길(시흥고개)을 통과하여 부장천다리(시흥4거리, 복개되어 흔적이 없으나 시흥2동쪽에서 안양천으로 흐르는 내를 부장천이라 했으며, 시흥대로와 교차점에 다리가 있었고, 당시 이 부근을 점막이라 하여 주막집과 숙소가 늘어져 있었음)를 지나서 시흥현 관아에 머물렀다. 그 후 박산(박미)을 경유 염불교(안양유원지 입구)를 거쳐 수원으로 향했다. 그래서 정조때에는 이 관아가 행궁(行宮)으로서 매우 중시되는 격을 올리면서 행정구역 명칭도 시흥으로 바꾸었다. 시흥동은 옛부터 시흥이 아니었다. 다른 고을도 그러했듯이 관아의 소재지는 대개 현내리, 군내리, 읍내리 등으로 불리었다.이곳도 기록상으로 나타난 것을 확인해 보면 여지도서에는 현내면 상평리(上坪里),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현내면 읍내리(邑內里)로 기록하고 있다.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에 의하여 시흥군 군내면 군내동이던 것을 시흥군 동면 시흥리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지금의 시흥동은『시흥』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 1970년 5월 18일에 시흥1 , 2동으로 분동되었다. 5년후인 1975년 10월 1일에는 시흥3동이 탄생했고, 1980년 4월 1일에는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구되면서 구로구 관할로 되었다. 1980년 7월 1일에 시흥4동이, 1983년 1월 1일에는 시흥본동이, 1985년 9월 1일에는 시흥5동이 각각 탄생하여 현재는 6개의 행정동으로 나눠졌다.

  • 시흥지역은 오랫동안 현(縣)의 관아가 있었던 지역이면서도 이렇다 할 유적은 없다. 다만 나이가 800살 넘은 은행나무와 그 근방에 선정비(善政碑) 몇 개가 있을 뿐이다. 아쉬운 것은 80여년 전까지만 해도 엄연히 존재했던 금천(시흥)현 관아가 지금은 행태는 물론 위치마저도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으니 통탄스럽다. 다만 그 행태는 알길이 없으나 고지도에 의하면 현재의 시흥5동과 2동 지역에 향교(鄕校), 사직단(社稷壇), 객사(客死), 행궁(行宮), 사창(司倉), 점막(店幕) 등이 표시되어 있다.

  •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800년된 두 은행나무사이에 돌다리가 있었다 하며, 지금 현대아파트가 들어선 곳에는 조선시대 이팔장이라는 정승이 지어 그 후손들이 오랜 동안 살아온 아흔아홉칸 집이 있었고, 삼천리 연립주택 자리에는 장택상씨의 별장이 있었다.

  • 1960년대 이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상실하였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금천의 주산인 호암산(조선후기에는 금지산으로 표기됨)에 남아있는 한우물, 호암산 성터, 석구상 등 문화재와 각시바위, 병풍바위, 감투바위, 칼바위 등 자연물이 옛날 이 지역민들의 생활상을 짐작케 하고 있다.

  • 또 시흥2동에 조선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구 관내 유일한 전통사찰인 호압사(虎壓寺)가 있다. 시흥4동에는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74호인 순흥안씨 양도공파묘군이 있다.

  • 농촌사회인 시흥지역에 1905년(광무 9년)에 경부선이 개통되고, 뒤이어 1914년에는 시흥역이 설립되면서 인적, 물적 이동과 함께 이 지역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시흥역을 통한 물류의 편리함 때문인지 연탄공장과 대한전선(1955년), 기아산업(1957년)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 2001년도에 89회의 졸업생을 배출한 시흥초등학교는 1911년에 개교한 후 이 지역 인재양성과 지역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 1965년부터 시흥2동 지역에 이주민이 정착되었고 1970년 경수국도(당시는 경부국도)가 확정되어 오늘의 모습을 찾게 되면서 이 지역은 서울 관문으로서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대부분의 서울 외곽이 그러하듯이 이 지역도 70년대 부동산 붐을 타고 크게 변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담당부서 시흥제1동 최종우 전화번호 02-2104-5632
최종수정일 :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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